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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

신학, 신지식, `안다, 앎`의 의미

신학, 신지식, `안다, 앎`의 의미
호세아서 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신학>

(1) 신학이란 말의 어원은 헬라어 ‘테오-로기아’이다.
즉, ‘하나님이 말하신다’ 와 ‘하나님을 말한다’라는 두 가지 의미로 다 사용될 수 있다.
신학은 그야말로 ‘하나님’과 ‘말’의 관계이다.
하나님에 관한 언설(言說) 즉 하나님에 관한 설교(說敎)가 신학이다.
‘신학은 하나님에게서 배워서, 하나님을 가르치며,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2) 신학이라는 말은 문헌적으로 플라톤(427-348, B.C)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시인들이 신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말하는 ‘신화를 뜻하였다.

(3)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신학이 곧 철학이었다.

(4)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신화와 대비적으로 ‘영생하는 말씀의 신학’이라는 말을 썼다.
신학자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신적 진리를 선포하는 자이며, 신학은 이 선포 자체이다.

(5) 말씀(로고스)라는 다리를 중심으로 로고스가 선포하는 삼위 하나님을 말하면, 그 것은 '신학'이고,
로고스를 중심으로 하여 삼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오이코노미아’이다.
인간론, 교회론, 구원론, 종말론, 여성신학, 해방신학 등은
헬라 신학 전통에 의하면 신학이 아니라 오이코노미아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언설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신학은 그야말로 ‘신'학이다. 그 강조점은 ‘하나님’에 있다.
신학은 삼위 ‘하나님’ 그 분만을 관심으로 삼는다.
우리는 하나님 그 분을 오직 우리를 위하여 행하여 주신 일, 곧 구원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기 때문에
동방신학과는 달리 ‘오이코노미아’ 자체를 곧 신학으로 본다.

(6)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 17:3을 근거로 하여 신학을 정의하려고 한다. 신학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7) 이 때 하나님을 안다는 개념은 일차적으로 지적인 의미가 아니라
선지자 호세아가 ‘내 백성은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호4:6)라고 절규할 때의 의미이다.

(8) 하나님의 율법을 망각하는 것은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잊혀진 분이 되었다.
이는 언약 관계 속에서 언약을 파기하고 율법을 범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선지자의 절규이다. (호 4:1, 8:1).
이스라엘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것은 ‘주지주의’에 근거한 냉철한 설득이 아니다.
도리어 결혼관계에서 부부의 의를 떠나는 행위가 행음이듯이,
이스라엘이 이전에는 야웨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가
이제는 ‘그 지식’ 곧 언약 관계를 깨뜨렸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알다’라는 말은 결코 지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말한다. 이 인격적인 관계를 떠나 지식이 없는 백성은
호세아에서 나오는 대로 ‘로암미’ 곧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신지식은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는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호 13:4)  
언약에 합당한 삶은 야웨의 구원 행위와 그 것에 근거한 하나님의 권리를 아는 것이다.

(9) 신약에서도 ‘알다’는 인격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요 8:54-55, 8:19, 6;69, 마16:16)
그러므로 칼빈이 신앙을 지식으로 정의한 것은 성경적인 탁견이다 :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진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자비에 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성부와 성자의 양 사역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생각에 계시되고 우리 마음에 인쳐졌다.“)
그가 신앙을 성령의 사역으로도 계속 설명하는 것을 고려하면,
삼위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 곧 신앙이 신학이다.

(10) 신학은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이 ‘안다’는 말은 인격과 인격의 관계,
하나님과 사람의 인격적 관계 곧 믿음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말이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말은 성(性)적인 관계를 의미할 정도로 아주 친밀하고 비밀한 관계를 뜻한다.
(창4:25; 삼상1:19; 마1:25).
이런 ‘신지식’이라는 의미에서 신학은 영생과 동일한 말이다. (요17:3; 8:54)

(11) 칼빈에게 있어서 지식과 경건은 이율배반적이지 않다:
경건이 없는 곳에 신지식은 없으며, 경건은 종교의 원천이다.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앎, 신지식)이 전인적인 예배를 통하여 나타난다.
‘일은 곧 기도다’ 그리고 기도는 곧 삶 자체이기도 하다.
삶의 행위로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가 구현됨이 곧 신학이었다.
예배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오심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의 영광에 들어감이라는 양면적인 교제의 방향이 있다.

(12) 신지식은 우리의 일이기 전에 믿음으로 받는 은사이다.
이 지식은 성령이 일으키신다.(고전 2:10-11)
우리의 신지식은 하나님이 계시를 통하여 당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데 대한 반응이다.
이 반응은 원초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기도와 전도이다.

(13) 지식은 대화와 교제를 통하여 우리와 사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앎이다.
지식은 지혜를 앎이며, 신앙과 상통하며, 신앙이란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파악이 아니라
인격(지혜)에 대한 신뢰이다. 이 신뢰는 심리적인 신뢰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관계요 참여이다.

(14) 이 인격적 참여를 전제하지 않는 신학적 지식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인격을 우리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였다. (고전 2:9)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령으로 ( 이 지혜를)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그리스도이다.(고전 1:24)
우리는 이 지혜를 성경에서 뵙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오신다.
이 신앙을 통한 교제는 기도(예배)에서 잘 나타난다.
기도에서 우리는 대상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만난다.
기도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며,
동시에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를 방편으로 삼아 우리를 찾아 오신다.
나아가 먼저 계시와 기도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을 도구로 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되는 것이 넓은 의미로 전도이다.

"유해무 목사님 저서를 읽고 ... 부분 부분을 적어 놓았습니다."

-유해무 교수, 개혁교의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