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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기/SFC 날마다 주님과

창세기 11장 1-9절

창세기 11장 1-9절.hwp

2014년 1월 20일 월요일 SFC 날마다 주님과 묵상 창세기 11장 1-9절

바벨이 기다리는 오순절의 은혜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2] 바벨의 성과 대를 쌓은 현장은 시날 평지이다. 이곳은 니므롯의 발원지이다[창10:9-10]. 시날은 바벨과 바벨론 문명의 중심지이다. 나중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의 전리품을 가져다 놓은 신전들이 있는 곳도 바로 시날이다[단1:2].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세상 나라의 대표는 시날에서 발원한 바벨론이다[계18:2 등].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4] 하늘에 닿게 한다는 말은 높이 쌓겠다는 의지이다. 얼마나 높았을지 모른다. 또한 하늘은 하나님과 연결된다. 그런데 문제는 왜 쌓았는가이다. 왜 하늘에 닿을만큼 쌓았는가?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의지이다. 바벨은 홍수 이후에 신에 대한 저항과 같다. 홍수가 나도 견딜 수 있는 높은 대를 쌓으면서 홍수로 심판한 하나님에 대한 저항의지가 분명하다. 우리 이름을 내는 주체가 '우리'이다. 이름을 내는 것은 권력의지이다. 자신들을 하나님에게 종속시키지 않는 힘을 구축하려는 의도이다. 인간의 힘을 하나로 결집하여서 사회적 힘을 만들고, 이를 통해서 홍수와 같은 신의 재앙에 대한 저항의지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6] 인간들이 성과 탑을 쌓는 것을 보시려고 직접 내려오셨다. 그리고 이런 행위가 심판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아시고, 제어하기를 원하셨다. 막을 수 없다는 말은 저들의 일이 불러올 마지막 재앙이 불가피함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제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가 하나이고 한 무리로 있는 인간들의 지속된 시도 의지를 제어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함을 말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7] 이것은 3절과 대조가 된다. 인간이 말한다. "자, 벽돌을 만들어…"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가 맞부딪힌다. 인간들이 한 언어이기에 소통이 되고 이를 통해서 한 무리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권력 구조를 가지기를 원하였기에,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시고 있다. 언어를 혼잡하게 되어 의사 소통이 되지 않음으로 한 구성체가 깨어졌다. 이로 인해서 성 쌓는 일이 중단되고, 흩어졌다. 흩어지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흩어짐의 결과가 10장에서 말하는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나뉜 것을 말한다[10:5,20,31]. 홍수 후에 백성들이 나뉘었다고 10:32절이 진술하는데, 이 원인이 바로 11장의 바벨 사건이다. 따라서 연대기로 하면 11장이 나누어진 사건에 우선되지만 노아 이후 세 아들의 족보를 기록하다가 흩어지는 시점에서 중단하고, 그 중단의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기록을 하였다.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9] 8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기에 도시 건설을 중단했다고 한다. 8,9절에서 두번이나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흩으셨다고 강조한다. 이는 흩으심으로 민족과 나라들이 선다. 따라서 나누어진 나라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상황을 모면하는 방편이다. 모든 사람들이 홍수와 같은 심판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는 역할을 국가와 사회 집단들이 한다. 흩어짐은 죄를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한 모습이다. 이런 흩어진 나라 속에 하나님께서 죄를 제거하는 나라를 아브라함을 불러서 세우시려고 하신다. 바로 이스라엘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2. 본문의 흐름
노아 홍수 후에 인간들이 번성하게 된다. 번성은 힘을 가지고 온다. 이 힘을 결집하는 자가 니므롯이다. 니므롯은 이 힘을 이용해서 홍수와 같은 신의 재앙을 극복하는 제국 형성에 관심을 가진다. 이름은 권력이다. 하늘에 닿는 건축물을 통해서 홍수를 극복하고 신에게 저항할 수 있는 자치적인 권력을 형성하려고 한다. 이것을 그대로 두면 홍수와 같은 마지막 심판이 불가피하다. 하나님께서 무지개의 언약을 통해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니므롯과 인류이다. 실제로는 오히려 물이 아닌 소돔에 내린 것과 같은 불심판을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번성하게 하시고 죄를 극복하는 길을 보이시기 위해서 바벨의 의지를 언어를 혼잡하게 함으로 나라와 민족으로 흩으셨다. 이 흩어짐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심판을 자제하시고 창조 세계의 회복의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들은 죄를 제어하는 기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죄를 제어하는 기능에 충실하지 못하고 죄가 가득할 경우에 심판을 당하게 된다. 가나안이나 소돔과 고모라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나라와 민족의 형성에는 죄를 억제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관원이나 임금을 하나님의 사자로까지 표현한다. 그러나 홍수와 마찬가지로 바벨로 인한 나라의 생성이 죄를 억제하거나 제어할뿐이지 제거하지는 못한다. 뿌리까지 뽑을 수 있는 길이 아직도 가야한다.

3. 본문에 대한 질문
왜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했고, 우리 이름을 내려고 했을까?
두번의 '자'의 대조[3,7]와 대립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혼잡이란 이름의 바벨이 왜 하나님의 은혜일까?

4. 본문에서 적용으로
바벨이 우리 이름을 우리가 내기 위한 즉 인간의 나라를 스스로 세우기 위한 시도였다. 홍수를 견디기 위해서 무지개의 언약의 말씀을 짓밟는 행위로서 성과 대를 쌓는 행위였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가진 위로와 안전이 그렇게 무력할까? 정말 우리가 성을 쌓고, 우리 힘을 길러야만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 노아가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은혜였다. 바로 그런 은혜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무척이나 적실하다. 복음의 은혜가 우리를 살린다.
죄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저항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의지를 위해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사람들을 흩으신다. 그래서 나라들이 생겨난다.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유보의 상징이다. 죄를 제어하는 실체이다. 그래서 국가는 죄를 방기해서 안된다. 그런 기능에서 떠날때 죄를 조장하고 죄가 가득한 나라가 될때 세상나라라도 역사속에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어떤 제국도 길게 가지 못했고, 결국은 망했다. 어떤 불의한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여기에 정말 필요한 진정한 은혜가 더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우는 제사장 나라가 필요하다. 죄를 제거하여 용서가 있는 나라가 필요하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이다.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존재한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성도와 교회의 존귀함은 죄를 사하는 복음을 소유한 것이다. 죄를 제어하는 소극적인 은혜가 국가와 사회라면, 죄를 제거하는 적극적인 은혜가 바로 복음과 교회이다. 그래서 복음의 은혜가 오순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충만하게 될때, 나누어진 언어와 나라들이 하나로 다시 연합하게 된다. 복음이 무너뜨린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이며, 각종 장벽들을 무너뜨리게 된다. 이 복음의 능력이 만들어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오늘도 충만하길 소망한다.

5. 본문에서 찬송과 기도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나라로 흩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모든 주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위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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