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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

성령과 구원사역

본 각론은 그리스도가 이미 획득한 구속을 적용하는 성령의 구원사역이다.
1. 성령강림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한 성령이 예수께 임하므로 예수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요엘이 예언한 바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심으로 교회시대가 도래하였다 이 교회 시대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구체적으로 도래했다. 따라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구원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배경은 다음 두 가지이다.
이스라엘은 첫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 법, 특히 십계명과 더불어 당신의 백성 중에 거처를 정하셨다. 이것은 ‘언약의 축제’이다. 이런 임재가 시대를 넘어서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성취되었다. 둘째로, 구약 시대에는 이 오순절이 수확의 절기였다. (출 23:16; 레 23:16이하; 민 28:16). 유월절에 첫 곡식이 주께 바쳐졌다면, 오순절에는 새로 수확한 밀로 만든 떡 두개를 야웨께 성소에다 진설했다. 마치 들판에서 익은 첫 곡식처럼 유월절 어린양 그리스도가 당신의 사역을 십자가가 부활로 완성하신 것을, 이제는 성령이 오셔서 그것을 빵으로 만들어서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적용하시려는 절기와 신호가 오순절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없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부활과 상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생략 ..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성령의 선교사역을 본다. 오순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의 최고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성령에 의하여 그의 몸인 사도적 교회에 주어지며, 이는 교회의 성령론적 측면이다. 그러나 성자의 성육신과는 달리 성령강림은 단회적이지 않고, 첫사건이다. 칼빈은 ‘능력이 사도들의 설교에서만 시위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 능력이 여전히 날마다 계시되어진다’고 주석한다. 성령님은 오순절에 부어지셨는데, 계속 다시 부어지실 것이다. 성령의 강림은 오순절날의 사건일 뿐 아니라 다음 시대에서도 온 땅 위에 확장될 성령 부으심의 시작이다. 사람이 성령을 받음으로 그의 연약한 모습이 새 피조물로 완전하게 변하여 질 때까지 새로운 성령의 은사들은 계속 받을 것이다.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에게 미친 직접적인 결과는 먼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말함이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께서 주신 약속의 성취이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아니라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말했다.(막 13:11 참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대로 그와 다른 제자들이 설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눅 24:45 참고.) 물론 그와 다른 사도들의 말은 전도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기독록적이고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하여 교회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성령님의 다양한 은사들이 성령 강림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2. 성령의 은사
하나님의 한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사역에 있으며 (롬3:24), 하나님은 이 은혜를 죄인에게 주신다. (롬 3:23; 5:10; 갈 2:17-21). 그리고 예수를 입으로 시인케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고전 12:3) 즉 믿음도 은혜이며, 그 믿음을 일으키시는 분 또한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런 은혜는 때때로 은사로 표현되기도 한다. (롬 5:15이하; 6:23; 고후 1:11 엡 4:7). 그런데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등에서는 교회의 내외적 삶에서 나타나는 영적 섬김의 기능들을 특별히 은사로 부르고 있다. 이 은사들은 성도 개개인들에게 주어졌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이와 동시에 또 성령에게서 받은 선물들을 은사라 할 수 있다. 각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하여 신자가 되고, 그 결과로 은사까지도 받는다. (벧전 4:10). 이처럼 구원론적인 은혜는 성도의 삶에서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그 중에 은사가 있다.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인하여 우리에게 말과 지식과 은사들이 나타난다. (고전 1:4-7)
신자인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는 각각 다르며 (롬12:6) 은사와 직임과 역사는 여러 가지이다 (고전12:4-6). 여기에서 신자의 시초인 믿음이 먼저 나오고 (롬 12:3; 고전 12:3), 은사들이 뒤이어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믿음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됨이 먼저요, 그리고 나서 이들에게 은사들이 주어진다. 모든 신자들은 한 몸의 지체들이나, 직분과 은사는 각각 다르다. (롬12:5; 고전 12:11) 그리고 은사들의 목적은 교회와 교중들을 세우는 데 있다. (고전 12:7; 14:4,5,17; 엡 4:12-16). 이처럼 은사들이 활동하는 장소는 일차적으로 교회이다. (롬12:10; 13:10; 고전 13:1). 각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나 각각의 고유성을 지니며, 그것으로 다른 성도들을 섬겨야 함을 보여준다. 덕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모든 것을 써야 하며 (고전 14:26), 따라서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 16:14), 또한 교회 밖을 위한 은사들이 있다. (고전 14:22이하). 이와 같이 신약교회 자체는 은사로 채워져 있다.
바울이 언급하는 은사들을 보면, 예언, 섬김, 가르침, 권위,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풂(롬12:6-8), 믿음, 신유, 이적행함,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사도, 선지자, 교사, 목사직, 서로 도움 (고전 12:9,10,28; 엡 4:11)등이 나타난다. 독신 생활과 결혼도 은사이다. (고전 7:7) 또 다른 곳에서는 대접,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도 언급되어 있다. (벧전 4:10). 이 목록에는 너무나 평범하여서 은사로 불려지기에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 것들도 있고, 방언이나 신유처럼 이목을 집중시키는 은사들도 있다.


3. 성령의 은사와 성령세례
오순절 운도에서 성령세례의 특징으로는 성결, 하나님과의 직접교통의 체험, 증거의 능력, 성령으로 기도함, 일반신자와 구분되는 고상한 체험, 기쁨, 중독(마약)에서의 해방등이다. 그런데 신앙은 이를 받는 조건이며, 사도행전 2장 등은 예외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이를 받을 수 있다는 본보기이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므로, 성령을 특별히 간구해야 한다. 또 신유가 중요한 특징이다. 그들은 성령의 모든 은사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보면서, 은사들 가운데서 특히 방언을 강조한다. 성결운동에서 오순절운동으로 넘어갈 때, 성령세례의 가시적 증거인 방언이 제시되었다. 이들은 사도행전 2장, 19장을 예로 든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생명부지의 언어로 보았으며,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언어기관을 사용하는 성령의 자기현시로 이해했다.
방언을 비롯한 오순절의 은사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엇보다도 이들은 성경의 증거보다는 경험을 중시한다. “오순절운동의 최대 특징은 어떤 구체적인 체험이 결정적인 의미를 지는 데에 있다. 체험이 오순절운동의 발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성경해석의 열쇠일 뿐 아니라, 그 체험이 없는 자는 대화의 상대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등에 기록된 특별은사들은 사도시대에 교회 설립과 설교의 확립을 위하여 필요했다고 여긴다. (이점에서 우리는 사도들과 그들의 안수를 받은 자들의 사망과 더불어 특별은사들은 중단되었고, 이 점은 특별 계시의 종결과 연관된다는 위필드의 입장에 동의한다.) 특별은사들은 구속역사의 진전을 알리는 증거이다. 우리가 위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복음이 사도행전 1:8에 예언된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증거됨을 사도행전의 뒷 부분은 보여준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구원역사의 진전을 이스라엘에게 공표하는 표적이다. (사 28:11 이하; 고전 14:21에 인용). 8장에서는 사마리아교회를 통하여, 아브라함에 약속된 모든 족속의 축복 (창 12:3)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10장의 이방인 교회(고넬료)에 임한 동일한 성령과 방언은 구원의 진전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경계가 성령 안에서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19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방언은 이 구체적 집단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연합되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시위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교회가 되었다는 구원역사적인 지전의 표시로 방언이나 예언이 증거로 주어졌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말했고 (행4:31), 마음에 기쁨이 충만했다(행 13:52). 또 방언을 말하기도 했고 (행10:46), 에언도 했다.(행 19:6). 성령세계를 받은 자들에 대하여서는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행 6:3; 7:55). 사도행전 8장, 10장과 19장에 성령세례의 증거들이 나타나지만, 묘하게도 충만이라는 표현은 없다. 그렇지만 성령세례와 충만은 이처럼 서로 밀접하여 사실상 일치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기쁨과 담대함을 이 증거들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으며, 반대로 방언과 예언을 성령 충만의 표적으로 칭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의 기조를 이루는 배타적인 선중생, 후성령세레의 도식은 수용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도 성령의 주권에 따라 은사들이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 주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 하여 성경에 언급된 ‘모든’ 열광적 은사들이 지금도 나타난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덕을 세울 수만 있다면 고린도전서 12장의 방언에 대해서는 유연한 입장을 취할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교회에 나타나는 은사들 중에는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도리어 파괴하는 사단의 역사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의 주권을 오히려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여 이런 역작용 때문에 일부 은사들이 사라졌다고는 말 할 수 없으며, 아무런 제한없이 모든 은사들이 지금도 주어진다고 확언할 수도 없다. 선물인 은사들은 성령의 자유에 속하므로 허용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사건의 구속사적 특징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그재현 가능성만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욕을 보임(히6:6)에 비견되는, 성령의 자유를 제한함이다.
우리는 은사들이 교회의 표지가 아님을 또한 안다. 설교와 성례에 주어지는 복음 전파에 교회의 생사가 달려있다. 교회가 내외적인 복음 전파를 위하여 간구할 때, 성령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여러 은사들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몇가지 혹은 모든 은사들의 부재가 교회의 성장을 저해한다고 단언해서는 안된다. 현대 교회가 무능력하고 침체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은사들의 부재보다는 참된 복음설교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들의 관심이 은사문제에 지나치게 쏠려 있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교회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고 능력있게 설교되며, 우리가 그대로 살고 있는가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관심있게 살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고전 12:31; 14:1).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는 가장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한다. 바울이 이미 12장에서 여러 은사들을 언급한 것을 고려할 때, 이 권면의 의도가 잘 나타난다. 그가 말하는 큰 은사들은 사랑(13장)과 예언의 은사(14장)이다. 우리가 기도로 은사를 간구할 수 있으나 (고전 14:13), 모든 은사들이 아니라 위 두 은사들을 우리는 사모해야 한다. 교회를 세우는 데 특별히 어떤 은사들이 중요한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고전 14:6 참고)
무분별한 성령, 은사 운동들이 보여주듯이, 교회의 질서를 깨거나 특정 은사나 또는 그것에 입각한 은사 교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바울의 교훈에 위배된다 (고전 14:40) 이는 성령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은사의 풍성한 다양성을 무시하고 교회를 단조롭게 만들 뿐 아니라 특정 은사를 얻기 위한 방법론의 횡포를 초래할 것이다.



발췌 : 개혁 교의학 (유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