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고린도 교회에게 필요한 것: 십자가와 삼위 하나님의 이름
1. 본문의 번역
10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같은 말을 하고, 그리고 너희 가운데 분열이 없이 온전히 같은 이해와 의도에 이르라.
11 나의 형제들아 글로에 집안 사람들을 통해 너희에 대한 (소문이) 내게 분명히 들리기를 곧 너희에게 다툼이 있음이라.
12 너희 각자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 속하였다고 말한다.
13 그리스도가 나누어졌는가?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라도 졌는가? 혹은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
14 그리스보와 가이야 외에는 너희 중에 누구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않았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15 너희가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누구도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16 그리고 내 스테바노 집에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모르겠다
17 그리스도가 나를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2. 본문에 대한 고려와 질문들
본문은 1:10-4:21절에 걸쳐 나오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문제를 다루는 첫 시작이다. 서론적인 인사와 감사를 통해 드러난 복음의 은혜와 은사가 고린도 교회를 견고히 세울 것을 분명히 하면서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한다.
10-11절에서 형제들아, 혹은 내 형제들아 라는 칭호로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양 절에 나오는 분열과 분쟁과 관련되어 보인다.
12절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에게 각각 속했다고 할 때 각 파당의 정체성이 무엇일까?
13절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십자가와 세례가 등장한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십자가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만 가능한 세례를 언급함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유일함을 증거한다. 이것이 11절에서 제기된 분쟁과 분열의 문제에 대한 복음적 답변을 바울은 시작한다.
13-16절에서 여러 파당의 당사자이기도 한 바울은 다른 대상자를 언급하지 않고 단지 자신만을 언급한다. 그리고 자신과 예수님과 그리고 그의 복음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다른 사도들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자신의 사도성도 지키는 방식이다. 복음 자체가 될 수 없는 바울을 따르는 일의 어리석음을 지적함으로 고린도 교회 전체의 파당적 질서를 복음으로 지적한다.
16절 14절에서 이미 그리스도와 가이오 외에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15절을 기록하고 나서는 16절에서 자기가 세례를 준 사람이 기억이 난다.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일이다. 이렇게 하고 나니 더 있는지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표현을 한다. 이런 실수와 같은 사실을 본문을 지우고 왜 다시 기록하지 않았을까? 현재의 문맥은 바울에게 속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증거하는 바울의 수사적인 방식이다. 예수님의 복음이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 한다.
17절 세례를 베푸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분리가 된다는 것인가? 사도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왜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을까? 그것은 복음과 세례의 관계에서 복음이 우선된다고 보는 것이다. 말의 지혜는 계속되는 본문에서 헬라적인 지혜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미련한 것과 대조시킨다. 미련한 죽음 죄가 없지만 항변하지 못하고 죽는 죽음이 세상에서 볼때 미련하다. 그러나 그런 미련을 통해서 복음은 세상을 위로한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고난을 통해서 십자가의 복음이 효력있게 증거된다.
3. 나는 바울에게(12)
교회들은 나름의 질서와 전통이 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그리고 심지어는 성향적인 차이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서 있다. 비록 많은 차이점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에 있어 차이가 있지 않다. 십자가의 구속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가 무너지면 그리스도가 나뉘는 것이다.
나아가서 교회안에 다양한 무리들이 있지만 인간 지도자가 중심된 집단이 되어서는 안됨을 말한다. 바울, 아볼로, 그리고 게바 등은 모두 고린도 교회에 영향을 미친 사도이자 복음 전도자들이다. 그리스도는 본질파인가? 오늘의 교회도 십자가와 삼위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한 세례를 통해서 복음의 참된 능력을 증거해야 한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고 삼위 하나님의 경륜으로서 구원의 세례에 이르지 못한다. 십자가와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성경에서 잘 발견하여서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 교회의 분쟁과 분리를 해결하는 길은 십자가와 삼위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고백과 수용이다. 고백과 수용은 현실적인 질서를 비평적으로 돌아보는 것이다. 십자가와 그 결과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나타나는 세례로 교인됨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행위들이 있지 않는가를 세계관적 관점에서 오늘의 현실을 조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고린도 전서를 통해서 이런 복음의 지혜가 어떻게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지를 배울 것에 대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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