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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기/SFC 날마다 주님과

시편 41편 1-13절

여호와여 은혜를 베푸소서

1. 본문의 번역
1 약한 자를 이해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악한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구원하신다. 
2 여호와여 그를 지키시고 살게 하시며 땅에서 복을 받게 하소서
그를 원수가 바라는대로 넘겨주지 마십시오. 
3 여호와께서 병상에 누운 환자인 그를 지탱해 주시고 
그가 병으로 인해 누운 모든 병상을 바꾸어 주신다(병상에서 일으키신다). 
4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고치소서
내가 주게 범죄하였습니다. 
5 나의 대적이 악하게 말하기를
그가 언제 죽을까? 그 명성이 언제 망할까? 
6 (나를)보러 와서는 그가 거짓을 말하고
악을 쌓고 밖으로 나가서 떠든다. 
7 나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이 함께 나에 대해서 수근거리고
나에게 대해서 악을 도모한다. 
8 "심한 질병이 그에게 들었다. 
그리고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먹던 사이좋던 사람마저 
내게 대해 발꿈치를 크게 했다(들었다, 크게 속였다 Lxx)
10 여호와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일으켜 그들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11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기지 못하기에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것을 내가 압니다. 
12 주께서 나의 순전함을 지지해 주시고 
주 앞에서 영영히 나를 세우시나이다.
13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합니다. 
아멘, 아멘

2. 본문에 대한 고려와 질문 그리고 단락
1절에서 '복 있도다'는 시1:1절과 40:4절과 관련이 있다. 각 구절들과의 관계는?
1-3절은 약한 자 즉 병든 자를 이해하고 돌아본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복 주심을 기원한다. 또한 반대로 그가 병이 들었을 때 도와 주신다. 
4, 10절에서 여호와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한다. 즉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는 탄원이다. 이것은 문단의 처음과 끝이 된다(inclusio). 그 사이에 있는 5-9절은 원수들에 의해서 조롱을 당한 일들을 하나님께 고소한다. 결과적으로 4-10절이 한단락을 이룬다. 
11-12절은 원수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순전함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13절은 시편 제 1권의 결론적인 송영이다(시106:48편 비교).
시인은 죄로 인해서(4) 질병가운데 있었다(8). 그러나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그를 순전하게 여기시고 고쳐 주신다(3). 이로 인해서 자신을 비방한 원수들에게 보복할 수 있게 된다(10). 원수는 늘 틈을 타서 욥과 같은 순전한 자를 넘어뜨리려 한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연약한 자를 이해하고 돌보는 자를 하나님께서 순전하다고 인정하시고 어려운 자리에서 혹 병중에서 일으키신다. 

3.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1)
여기서 가난한 자를 lxx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여서 한단어 더 추가해서 번역한다(πτωχὸν καὶ πένητα). 그런데 시편 전체의 문맥을 볼때 병이 지배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라는 번역보다는 약한 자란 번역을 하고 그 실제는 병든 자로 이해한다. 
병든 자를 이해해 준 자를 하나님께서도 그가 악한 일을 당할 때(특히 병에 걸릴때) 건져주신다. 나아가 복 있는 자로 규정된다(1a). 그래서 복을 받는다고 한다(2). 
시1:1에서 말하는 복은 악과 죄 그리고 오만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함으로 의인의 길에 서는 것이다. 이것이 시40편과 41편에서 각각 제시된다. 시40:4절은 1:1절과 연결된다.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친 자를 돌아보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버려야 할 악이다. 반대로 시41:1절에서는 약한 자를 돌보아 주는 의인을 소개하며서 그가 복있다고 한다. 그래서 시40,41편은 시편 제1권을 끝내면서 복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더 상세하게 밝혀준다. 
병든 자를 돌보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시편 자체의 문맥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호소와 연결된다(4,10). 불쌍히 여겨달라. 이것을 신약적으로는 산상보훈과 연결한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나아가 종말 비유에서 양과 염소비유와 관련된다(마25:31-46). 

4.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9)
발꿈치를 들었다는 표현은 말이 주인에게 대해서 반항하면서 발을 드는 상황이다. 그래서 배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식사를 하는 사이 즉 평화의 인사를 주고받는 절친의 관계를 배신하는 행위이다. 다윗의 시로 본다면 아히도벨이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에게로 간 행위와 같다(삼하16:20-17:3, 23참조). 
나아가서 본문이 신약에서 가룟유다의 행위에 적용되어 인용된다(요13:18). 그럼으로 메시야의 시로 볼수도 있다. 요13:1절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면서 식사를 하시고 발을 씻기신다. 그러나 유다는 이를 배신한다. 그의 배신이 원수됨과 악인의 길과 연결된다. 결국 아히도벨의 길로 간다. 죄 없는 순전한 자를 배신하여 죄인으로 만드는 것을 여호와께서 보시고 아신다. 그런 하나님만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을 받으신다. 아멘

진정으로 회개하고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린다. 복음을 듣고 위로를 얻고 함께 선한 열심을 품고 세상을 살 용기를 함께 나눈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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